짜장면은 어떻게 한국 대표 요리가 되었나?-한국 화교 흥망사.

한국 짜장면이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가 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국에서 화교가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는지와 맞닿아 있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화폐개혁을 단행해서 지하 경제를 수면 위로 올리려고 했다. 이 화폐개혁은 현금을 꿍쳐두는 걸로 유명한 화교에 큰 타격을 입혔다. 화폐개혁은 화교에 타격을 입힐 목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니지만 1962년에 입법한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외국인토지법은 한국 화교들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히고 한국에서의 경제적 입지를 줄일 목적으로 제정한 법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한국 화교는 임오군란 이후에 한국에 들어와 불평등 조약을 등에 업고 부를 쌓은 다음에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부역하는 형태로 부를 유지했다. 게다가 해방 직후에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상황을 이용해서 큰 이익을 얻었는데 1946년 전체 수입 총액의 82%가 1948년에는 52.5%가 화상을 통한 무역이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화교의 경제력을 위협적으로 생각한 것은 과민한 반응은 아니었다.

카프의 일원이었던 월북작가 엄흥섭의 단편소설 '파산선고'(1930)는 화교 자본에 몰락하는 평양 소상인을 그린 작품이다. 김동인 작가의 '감자(고구마)'를 비롯해서 당시의 소설에서 한반도에서 화교가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1970년에 법이 개정되면서 화교의 토지 소유는 가능해졌지만 점포는 50평, 땅은 200평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남은 많은 화교들이 50평 안에서 영업이 가능한 중국집으로 업종을 바꾸기 시작했다.

화교들이 식당으로 업종을 전환한 70년대는 중국집을 운영하기에 좋은 시절이었다. 정부가 혼분식을 장려하면서 밀가루 음식을 파는 식당을 지원해줬기 때문에 짜장면과 짬뽕은 중국집의 메인 메뉴로 떠올랐다. 물론 중국집에서 쌀로 만든 음식을 파는 걸 금지했으니 짜장면과 짬뽕을 주로 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교 중식당은 장사가 잘되어도 가게를 늘리기 어려웠다. 식당으로 시작해서 호텔까지 올리는 것이 화교의 흐름이지만, 외국인토지법 때문에 아무리 장사가 잘되도 가게를 확장하는 것은 어려웠다. 믿을 만한 한국 국적의 친구에게 부탁해서 명의로 옮겨 놓았다가, 막상 친구가 죽고 친구의 자녀들이 소송으로 '아버지의 땅'을 돌려받은 사례도 있고. 아서원 같이 대법원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조선공산당을 낳은 황금동 아서원

아서원은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위치했던 중화요릿집으로 화교 서광빈 씨가 1907년(자료에 따라서는 1918년)에 문을 연 중화요릿집으로 규모로는 서울 안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라 1925년에 '조선 공산당 창건식'이 아서원에서 열린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로는 아서원에 가서 기생을 끼고 흥청망청 노는 것이 요즘의 '플렉스'였기 때문에, 아서원에서 무전취식으로 술판을 벌이다가 신문에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이 아서원이 1969년에 시가의 5분의 1도 안 되는 6천만 원에 반도 호텔을 인수한 롯데 호텔에 팔리는 사건이 있었다. 땅을 판 것은 서광빈 씨의 외동딸이었지만, 화교의 사업체가 모두 그렇듯 26명의 대주주가 존재하는 일종의 주식회사였다. 주주 중에 한 명인 서광빈 씨의 딸이 다른 대주주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팔아 버린 것이다. 주주들은 서광빈 씨의 딸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었지만 대법원까지 가서 패소했다. 아서원의 대주주들은 화교라는 이유로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강한 것은 동남아시아가 발전하면서 부동산 시세가 치솟았고, 땅에 투자하는 전통이 있는 화교들이 큰 부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화교들이 중국 식당을 하게 된 이유가 점포 규모가 제한되기 때문이었다면, 많은 화교가 중국 식당을 때려치우고 미국이나 대만으로 떠난 이유 역시 점포 규모가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중국 식당을 열심히 운영해서 손님이 늘어나 규모를 늘려야 하는 순간이 오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식당을 확장하는데 가능한 선택의 수가 많지 않았다. 앞에서 이야기 한 절친한 한국인 친구 명의로 했다가 친구가 죽은 뒤에 돌려받지 못한 경우도 있고. 딸과 결혼한 한국인 사위 앞으로 돌리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경우였고, 한국인 직원 앞으로 명의를 돌렸다가 돌려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확장을 포기하고 가게를 정리해서 한국인에게 팔아넘기고 대만이나 친척이 자리 잡은 미국 등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집 이야기 중에 화교 주인이 대만이나 미국으로 떠나서 가게에서 배달하던 직원이 물려받았다는 이야기가 꽤 흔했다. 한국에 중국집이 그렇게 많은데도 막상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이 많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중화요리 레시피를 화교 커뮤니티 밖으로 돌리지 않는 화교지만 가게를 정리하면서 기본적인 레시피는 넘겨주기 마련인데,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짜장면이었고, 실제로도 만들기 가장 쉬운 메뉴도 짜장면이었다. 1948년부터 대량 생산된 사자표 춘장 덕분에 모든 중국집이 비슷한 퀄리티로 짜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만두 전문점 '원보'에는 짜장면, 짬뽕 없습니다!라고 적혀있는데, 한국의 중화요릿집에서 짜장면과 짬뽕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한국의 짜장면이 어떻게 한국에서 대표적인 메뉴가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싶었는데. 화교가 어떻게 한국을 떠나게 되었는지 이야기가 끝도 없이 나왔어 분량 조절에 정말 실패했다. 한국 인스턴트 라면 이야기도 진짜 끝이 없이 산으로 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일단 다음 편은 억지로 일본 라멘 이야기로 돌아간다.

진짜 짜장면 이야기-첨면장이 춘장이 된날.

중국과 다시 왕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중국에서 진짜 원조 짜장면을 먹어보려고 주문한 한국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일단 생김새부터 짜장면과 전혀 닮지 않았고, 맛은 더욱더 닮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짜기만 한 비빔국수가 어디가 짜장면이라는 불만은 당시에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태평 야시장의 짜장면

물론 중국에서 먹은 짜장면이 '진짜 짜장면'이다. 기름에 튀긴 첨면장에 여러 재료를 버무려 먹는 비빔 국수가 바로 짜장면인데, 한눈에 봐도 소스가 적어 보인다. 원래 짜장면은 소스가 적은 음식이었다. 첨면장은 된장의 일종이니까 맛이 결코 약하지 않다. 그냥 소스로 쓰기에는 짜고 떫은맛이 강하기 때문에 기름에 튀기는데, 그렇게 만든 소스에 여러 재료를 넣고 가볍게 비벼 먹는 음식으로 한국 화교의 고향인 산둥성의 요리로 산둥성을 벗어나면 보기 힘든 음식이다. 일본에도 짜장면의 일종인 쟈쟈멘(ジャージャー麵)이 있는데 이쪽은 중국의 짜장면과 무척 닮았다. 결국 한국의 짜장면이 원형인 중국 짜장면에서 굉장히 많이 바뀐 것인데, 왜 그렇게 많이 바뀌었을까?

1935년 조선일보의 기행문에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때 먹은 짜장면은 아마 중국의 짜장면에 거의 가까운 맛이었을 것이다. 첨면장도 된장처럼 집에서 담가 먹는 장류의 하나였으니 중국집마다 그 맛이 달랐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짜장면의 춘장이 등장하는 것은 1948년에 화교인 왕손산씨가 용화장유회사를 세워 만든 사자표 춘장이다. 지금도 한국 춘장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점유율에서 독보적인데 캐러멜 색소가 들어가 검은색이 진한 춘장을 처음 만든 곳이었다.

사자표 춘장의 등장으로 크게 바뀐 것은 대량생산으로 인해 누구나 손쉽게 짜장면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전에는 천면장을 직접 담그지 않으면 짜장면을 메뉴에 넣을 수 없었다. 중국집 우동보다 인지도가 떨어졌던 이유도 그 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자표 춘장의 등장으로 이제 누구나 짜장면을 메뉴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사자표 춘장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생각하면 한국의 짜장면은 사자표 춘장이 창조한 요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자표 춘장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한국 짜장면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춘장을 밀가루로 만든다는 점이다. 원래 첨면장은 콩과 밀을 섞어 만들지만 사자표 춘장은 처음에는 거의 밀가루로 만들었다고 한다. 1948년에야 춘장을 대량생산할 수 있었던 제일 큰 이유는 미국의 원조 밀가루 때문이었을 것이다. 짜장면의 면 역시 밀가루로 만드니 한국식 짜장면의 산파는 미국이라고 하도 빈말은 아니다.

한국식 짜장면이 대중적인 음식이 된 바탕에 미국 원조 밀가루가 있는 것은 라멘 하고 같은데, 한국식 짜장면과 라멘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막상 중국의 영향을 적게 받은 음식이라는 점이다. 처음 시작은 화교의 중화요리였지만 한국의 화교 중국집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짜장면은 중국집을 대표하는 메뉴가 될 수 있었다.

한국 화교의 몰락과 짜장면의 비상.... 점점 라멘에서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지만 역시 다음 편으로 이어진다.




왜 중국집에서 단무지가 나올까?-일제 강점기 조선의 중국 요릿집.

화교가 다른 나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한 첫걸음으로 동업으로 같은 화교를 대상으로 하는 중국 음식점을 차린다. 처음에는 노점으로 시작해서 식당으로 확장하는 경우도 많다. 화교의 중국요리뿐만 아니라 외국에 진출한 대부분의 로컬 푸드가 처음에는 외국에 살고 있는 같은 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요리에 대한 입맛은 어느 나라나 보수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일하는 화교의 숫자가 적지 않았고, 그런 화교 대상으로 식당이나 노점의 숫자가 적지 않았는데, 막상 일본인들이 손님으로 찾는 경우가 드물었다. 우리나라에도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사람이나 네팔 사람들을 위한 캄보디아 식당이나 네팔 식당의 숫자가 꽤 많지만 한국인 손님이 찾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하고 비슷한데, 밀가루 위주의 동물성 육수가 베이스인 중화요리는 당시만 해도 일본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중화요리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즐겨먹는 음식이지만 한국의 짜장면이나 미국의 좌종당계(General Tso's Chicken), 일본의 교자나 라멘 같이 현지화된 중화요리가 등장한 다음에야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제네럴 쏘 치킨

일본에서도 라멘 이전인 옛날에도 라멘과 비슷한 면요리를 파는 화교 식당이나 노점이 상당히 많았지만,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받아들여졌다면 난징 소바(南京そば)나 시나 소바(支那そば)같이 애매하면서 모멸적인 이름 대신 우육면이나 란주 라미엔 같은 제대로 된 중국요리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짜장면이 중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짜장면이라고 부르듯이.

비슷한 시기의 일본의 화교에 비하면 조선의 화교는 사정이 좋았다. 중국 본토와의 무역으로 일본의 화교보다 훨씬 주머니 사정이 좋았고, 그런 넉넉한 주머니 사정이 중국 요리 자체의 발전으로도 이어졌다. 호떡 노점으로 시작해서 중국집을 열고, 더 돈을 모아 호텔을 세우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중국어로 호텔을 반점이라고 부르는데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반점이 식당과 숙식을 모두 제공했던 시절의 흔적이다. 지금도 베이징에 있는 고급 호텔의 이름이 북경반점인데, 한국 중국집 이름에 반점이 유난히 많은 것도 잘 나가던 시절의 흔적이다. 지금은 좀 메뉴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짜장면, 짬뽕, 볶음밥에 탕수육이면 충분할 동네 중국집에도 난자완스나 팔보채, 해삼주스나 샥스핀 같은 고급 요리를 메뉴판에 올려놓았던 것도 옛날에 중국집이 정말 잘 나갔던 시절의 흔적이다.

그렇게 1920년대에 정점을 찍었던 조선의 화교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무역이라는 강점을 잃게 되었다. 일제가 조선의 일본인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화교 상인들의 무역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풀 꺾이게 된 조선의 화교들은 식당을 운영하면서 버티기 시작했는데, 일본의 화교들과 크게 다른 점은 조선의 화교들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래도 조선의 화교는 일본인 대상으로 장사를 많이 했다. 화교가 농사지은 채소도 구매력이 있는 일본인이 주 고객이었으니.

일제의 눈치가 보여 예전처럼 대규모로 장사를 못하게 된 조선의 화교는 일본인 손님을 대상으로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화교를 일부러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완충제이자 욕받이로 쓰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화교는 무역의 비중이 줄어든 대신 조선의 일본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로 화교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30년대 화교 식당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중국집에서 단무지를 주는 이유가 바로 일제 시대 일본인 손님을 받았던 흔적이다. 중국집이 일본인 손님을 많이 받았다는 흔적은 메뉴판에서도 등장한다.

90년대 초 영화루의 메뉴판

90년대 초 영화루의 메뉴판 사진이다. 짜장면이나 짬뽕보다 우동이 더 먼저 쓰여있다. 요즘은 취급하는 곳이 많지 않은 중국집 우동이 최근까지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나 짬뽕보다 더 대표적인 메뉴였던 흔적이다. 요즘은 취급하는 곳이 많지 않은데, 우동이라고 해도 가츠오부시 다시로 만든 일본식 우동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야채가 풍성하게 들어있는 조선 화교의 고향인 산둥지방의 요리인 따루미엔(大滷麵)이다. 중국요리 치고는 강하지 않은 국물에 면이 좀 굵다는 것을 빼면 우동하고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요리인데, 짜장면이나 짬뽕을 제치고 메뉴판의 제일 앞자리에 자리고 하고 있는 것은 따루미엔을 우동이라고 부르는 손님이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의문의 메뉴인 덴뿌라도 설명이 된다. 소스를 뿌리지 않은 탕수육 같은 덴뿌라는 일본 요리인 덴뿌라와 닮은 구석은 거의 없다. 물론 튀긴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일본 이름으로 불릴 이유가 없는 메뉴다. 하지만 소스 안 뿌린 돈가스를 덴뿌라라고 부르는 손님이 많았다면 어떨까?

오무라이스도 그렇다. 중국식 달걀 요리인 푸융단(芙蓉蛋)을 밥 위에 얹어 먹는 푸융단펀(芙蓉蛋飯)이 있는데 굳이 오무라이스라는 일본어를 쓴 이유가 있을까?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한 때 중국집의 대표 메뉴였던 우동, 덴푸라, 오무라이스가 중국집을 찾는 일본 손님들이 자주 찾던 메뉴라고 생각한다면 반찬으로 주는 단무지와 함께 이해가 된다. 우동, 덴푸라, 오무라이스가 중국집에 파는 메뉴 중에서 맛이 강하지 않아서 중국 요리가 낯선 일본인 입맛에 잘 맞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일본의 화교 식당보다 조선의 화교 식당이 더 일본인에게 가까웠던 것이 아이러니 한데, 해방 이후에 한반도에 남은 화교 중에 중국어와 일본어는 해도 한국말은 못 하는 화교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라멘 이야기가 아니라 화교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 같은데, 라멘의 뿌리가 중국 요리다 보니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다음 편은 짜장면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짜장면 이야기는 또 얼마나 길어질지 상상도 안된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