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나라 조선-조선에 정말 빙수가 없었을까? └XX에 먹으러가자.

모 음식 칼럼니스트가 유튜브에서 '팥빙수의 기원은 일본'이라는 이야기를 해서 화제가 되었다. 실제로 한국 팥빙수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빙수 자체가 일제시대에 대중화가 된 것은 사실이고 조선시대의 기록에 빙수의 원형이라고 할만한 음식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빙수의 기원이 일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 칼럼니스트의 주장은 일제시대에 부산과 인천에 얼음 공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얼음이 대중적이지 않았다고 보는데, 그렇게 보기에는 조선은 세계에서 유래 없이 여름에 얼음이 흔했던 나라였다.

한중일 3국은 유럽에 비하면 여름에 얼음을 먹고 사용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중국은 주나라 때 얼음을 빙고에 저장했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도 헤이안 시대에 얼음을 먹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우리나라도 위서 동이전이나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얼음을 보관하거나 나눠준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도 정종 2년에 신하들에게 열흘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눠줬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왕조 실록에도 태조 7년에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얼음을 잘라 저장하거나 얼음을 나눠준 기록이 꾸준히 등장한다.

여름에 얼음을 얼리는 냉동기술이 등장하기 수백 년 전이지만, 겨울에 가까운 강이 얼면 잘라서 빙고에 쌓아 놓는 것만으로도 여름까지 얼음을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냉장고가 없더라도 여름에 얼음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과 달리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는 얼음은 종묘사직의 존망이 걸린 귀중한 존재였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나라가 운영하는 얼음창고, 빙고는 서빙고와 동빙고, 그리고 궁 안에 있는 내빙고로 세 곳이 있었다. 문무백관이나 환자, 죄수들에게 나누어줄 얼음을 보관했던 제일 규모가 컸던 서빙고는 8곳의 빙고에 13만 4974 정의 얼음을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얼음 1 정의 크기는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길이 1척 5촌(45㎝), 너비 1척(30㎝), 두께 7촌(21㎝)으로 한 덩어리의 무게가 5관(18.75kg)이라고 하니, 서빙고에 보관된 얼음의 양은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 안의 내빙고는 그다음 규모로 궁중에서 사용할 2 만정의 얼음을 보관했다고 한다. 그리고 제일 규모가 작은 동빙고는 1만 244정으로 내빙고의 절반 규모였는데, 세 빙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었다. 바로 제사용 얼음이었다.

종묘와 사직의 제사에 필요한 얼음을 동빙고에 따로 보관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왕이 서거했을 때 필요한 얼음을 보관하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왕이 죽으면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5개월 동안 국상이 이어지는데, 그동안 왕의 시신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해 대량의 얼음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얼음 이용에 대한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국상에 대한 자료는 자세해서 국상에 얼음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잘 알 수 있는데. 얼음으로 된 빙반 위에 시신을 올리고 잔상과 잔병 사이에도 얼음을 채워 놓아 시신이 땅에 묻힐 때까지 썩지 않도록 유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왕이나 왕비가 병이 들거나 연로한 경우 동빙고에 채워 넣는 얼음 양을 두 배까지 늘려서 국상에 대비했다고 전해진다. 위서 동이전에도 부여에서는 여름철에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쓴다고 적혀있고, 동빙고를 태조 5년에 처음 만든 것을 생각하면 국상에 얼음을 이용하는 것은 오랫동안 내려온 조선의 전통이었다.

이렇다 보니 조선의 얼음을 관리하는 것은 나라의 제사를 담당하는 예조의 일이었고,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겨울이 되면 군역을 소집해서 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였는데, 너무 일이 고되어 도망치는 사람도 많고, 나라에서 술과 음식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빙역은 특히 가혹했다고 하는데 오죽했으면 나라에서 술과 음식을 따로 내려줄 정도였을까.

이 세 곳의 빙고 외에도 각지에 8군데 남아있는 석빙고 유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국 여기저기에 많은 빙고가 있었다. 각 지역의 관아가 운영하는 이 빙고들은 서울로 보낼 진상품을 보관하고 운송에 사용할 얼음을 보관했었다.

수박향이 난다는 안동의 버들은어의 제철은 살이 오르고 산란 직전인 7월, 아무리 빠른 편으로 보낸다고 해도 버들은어의 수박향을 지킬 수 없겠지만, 얼음을 채워 넣은 조빙궤(造氷櫃)에 넣어 한양으로 보냈다. 이미 조선시대에 냉장 유통을 했던 것이다. '동궁마마 가례시 기명발기'에는 얼음을 채워 넣은 저빙궤(菹氷櫃)가 나오는데 김치를 넣은 독을 보관하는데 쓰였다고 하니 조선시대 김치 냉장고의 원조였다.

이런 냉장 유통은 나라에서만 운영한 것은 아니었다. 한강의 수운을 장악했던 경강상인의 대표 상품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얼음이었다.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경강상인을 중심으로 운영했던 사빙고가 쌓아놓은 얼음의 양을 100 만정에서 300 만정이었다고 한다. 동, 서빙고와 내빙고를 합쳐 20 만정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의 양이다. 이 많은 사빙고의 얼음이 수산물의 냉장 유통에 쓰였다.

일제가 인천과 부산에 얼음공장을 세운 이유도 수산물의 냉장유통을 위해서였는데, 조선에서도 이미 18세기에 '빙어선'이라는 얼음을 채운 배로 어장에서 수산물을 사서 한양에 유통했던 것이다. 이런 빙어선을 위해 한강 상하류에 경강상인이 운영하는 30곳의 사빙고가 있었다. 경강상인은 한강의 수운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겨울에 한강이 얼면 얼음을 채취하는 것도 일도 아니었는데 1만 냥을 들여 사빙고를 지으면 얼음의 일부를 나라에 바치고도 24만 냥은 벌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얼음이 빙어선에만 쓰인 게 아니라, 당연히 어물전과 푸줏간도 대량의 얼음을 소비했다. 당시 한양 인구가 30만이었다고 하면 1인당 얼음 소비량이 70킬로그램에서 100킬로그램인 셈이다. 한여름의 한양에서 얼음은 그렇게 신기한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18세기의 조선에 빙수를 닮은 음식이 없었을까? 냉장 유통이 일상적이고 어물전하고 푸줏간에도 냉장을 위해 얼음을 이용하던 시절에 빙수를 닮은 음식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의 기록은 아니라 일제시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당시 경성의 빙수 장수도 인천의 얼음공장의 얼음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겨울에 한강의 얼음을 사서 단열효과가 있는 짚으로 싼 다음에 땅에 묻었다가, 여름에 되면 파내서 갈아서 빙수로 만들어서 팔았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도 이런 빙수 장수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대담한 가설로 냉면이 원래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먹던 음식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한양의 얼음 소비량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조선시대의 얼음 소비량이나 냉장 유통 그리고 국상에 쓰이는 얼음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연구되어 있고 사료도 많은데 막상 먹거리에 대한 연구가 미비해서 밝혀진 사료가 적다. 빙수의 원형에 가까운 음식이 하나만 있어도 모 칼럼니스트의 주장은 논파가 되는데, 애초에 그런 사료가 없으니 모 음식 칼럼니스트도 '팥빙수는 일본에서 왔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 일터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얼음 소비량을 생각하면, 이렇게 여름에 얼음이 흔한데 얼음을 갈아먹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음식 관련으로 사료를 찾다 보면 당시에 남긴 음식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다 양반님들이 음식 같은 천한 것을 자세히 정리해 글로 남기는 경우가 드물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이나 일본을 다녀오고 남긴 '열하일기'나 '연행록'등의 견문록에 중국과 일본에서 먹은 음식이 자세하게 적혀있는 것을 보면 배신감을 느낄 지경이다. 수산물에 대해서 큰 도움이 되는 '자산어보'나 '우해이어보'를 같은 책을 찾기 너무 어렵다. 그 '자산어보'와 '우해이어보'가 정약전과 김려가 귀양을 가서 소일거리로 쓰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했을 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더 귀양을 많이 보내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래도 최근에 옛날 식문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서 구할 수 있는 자료가 부쩍 늘어난 느낌이다. 계속 연구가 이어지다 보면 조선시대에 얼음으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지 밝혀지는 날이 올 날이 올 것이다. 조선시대의 빙고 유적은 돌로 지은 석빙고만 남아있는데, 2005년에 홍성에서 아파트를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목빙고 터를 발굴했다. 나무로 지은 목빙고는 오래가지 못해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 없었는데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아직도 목빙고 형태가 밝혀진 것처럼 얼음을 이용한 조선시대의 음식에 대해서도 언제가 밝혀지는 날이 올 것이다.

5월 번개 ├YYMMDD

오랜만에 블로그에 번개 일정을 올려 봅니다. 여름 오기 전에 봄 사케를 마셔줘야죠...

5월 번개

5월 26일(일요일)
시간 오후 1시
장소 차슈멘연구소
회비 2만원

[수원역] '一江水蝶鱼头'의 가지 볶음밥과 포자 만두. └XX에 먹으러가자.

한국에서 중국집 볶음밥은 짜장이 기본이긴 한데, 먹다보면 '이럴거면 그냥 짜장밥을 시키지'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죠, 그렇다 보니 진짜 중국식 볶음밥을 잘하는 곳을 따로 찾아야 하는데, 중국요리에서 볶음밥 자체는 사이드요리 라는 느낌이 커서. 여기다 싶은 가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수원역 앞에 중국 요리집이 꽤 많은데, '一江水蝶鱼头'라는 간체자 한자로 쓰인 간판이 눈길을 잡아끕니다. 가맹전화 번호가 따로 적혀있으면서도 한글이 한글자도 없네요, 만두 전문점인가 해서 기웃하는데, 안쪽에 테이블이 있고 메뉴판에 메뉴가 가득해서 들어가 봤습니다.
한글이 한글자도 없는 메뉴판은 낯설지 않지만, 요리 이름들은 꽤 낯섭니다. 볶음밥도 달걀 볶음밥 외에도 가지 볶음밥이 보이네요. 당연히 가지 볶음밥을 시킵니다.

메뉴판 제일 앞에 쓰여진 48000원짜리 요리가 이 가게의 대표 메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 파파고의 검색 기능을 사용해도 ㅈ ㅔ대로 된 검색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가자미 머리 탕 같은 요리라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습니다.'一江水蝶鱼头 일강수 접어두'라는 이름 중에 접어두가 가자미 머리를 뜻하더군요. 
주방에서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나온 가지 볶음밥. 오랜만에 제대로 된 볶음밥이라 맛있게 먹었네요. 짜장소스 볶음밥을 싫어하진 않는데, 짜장소스를 염두에 두고 간이 약하기 마련이라... 이렇게 간이 제대로 든 볶음밥은 오랜만에 먹었습니다.

양은 좀 적어서 만두를 따로 사려고 손짓을 섞어 3천원 어치를 주문을 했더니, 찐빵 크기의 커다란 만두를 네개나 포장해 줍니다.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첫 중국여행의 추억......

중국에서는 만두(만터우)는 흔히 맨빵을 뜻합니다. 꽃빵을 생각하면 되는데, 밀가루가 주식인 지방에서 맨밥처럼 먹는 빵이기 때문에 안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첫 중국여행에서 손짓발짓으로 구매한 호떡이 맨빵이었을 때의 황당함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화만두는 포자(빠오즈)라고 해야지 통합니다. 크기도 절반 정도고 개당 천원인걸 보면 이 안에는 분명 고명이 들어 있겠죠.
포자(빠오즈)도 주식으로 먹는 요리다보니 한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피가 두텁고 무게감이 있습니다. 대신 내용물은 간이 좀 강해서 밥과 반찬 느낌이 나지요. 한국에서는 왕만두라고 해도 이렇게 피를 무게감 있게 만들지는 않으니까 완전히 다른요리입니다.

볶음밥과 포자 만두 맛을 보니 꽤 본격적인 것 같은데, 대표 메뉴인 가자미 머리 탕이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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