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여행기 06. 오호츠크 해는 눈물로 젖어

오늘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몸이 편했고, 마음고생은 지금까지의 모든 여행 중에서도 첫 손 꼽을 날이었다.

최소 2만엔 이상의 피해를 입고, 그 여파로 나머지 일정도 꽈배기처럼 꼬일 뻔 했다. 잠정적인 피해는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

아침에 삿포로에서 출발하는 오호츠크 1호를 타고 아바시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후 한 시. 몇 군데 찍어둔 식당을 돌고 아바시리의 관광지인 오호츠크 유빙관과 시립 향토박물관을 돌고 5시18분에 출발하는 특급을 타면, 밤 아홉시에 아사히카와에 도착하는 헐렁하다면 헐렁하고 빡빡하다면 빡빡한 일정이었다.

2번 정류장에서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유빙관으로 가는 버스가 있고 출발시간은 1시 54분이었다. 짐도 코인로커에 맡기고, 역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정류장에서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는데 곧 버스가 왔다. 이게 이번 사건의 원흉이었다.

버스 안에는 ‘겨울 방학기간 동안, 아침 저녁시간 운행 축소.’안내가 붙어있었다. “역시 홋카이도.”하면서 감탄했다. 한 시간에 버스 한 대 다니기도 힘든 시골 동네. 하지만 이때는 이 안내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가이드 북에 버스타고 15분 걸린다고 되어있는데, 시계를 보니 2시 5분, 지도를 보면 유빙관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절반은 산길이다. 그러니까 지금쯤은 산길을 오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호수 옆을 달리고 있었다. 일단 15분 까지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아니 적어도 이때 깨달았어야 했다. 여전히 오른쪽 차창으로 보이는 호수가 아바시리호가 아니라 노토로 호라는 것을.

여전히 호수가 사라지지 않자, 버스를 잘못 탄 것을 확신했다. 이미 요금은 600엔이 넘어간 시점이었다.
지금 정리하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식당에서 십 분 여유를 두고 나왔으니, 좀 더 기다렸어야 했다. 워낙 버스가 드문 홋카이도다 보니 버스를 보고 반사적으로 타고 말았는데. 10분이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20분도 넘었던 상황.
우리나라라면 바로 내려서 길 건너 반대편 버스를 탔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사람이 사는 곳에 내려야지. 눈 밖에 없는 허허벌판에 몇 시간을 기다려야 될지 모를 일이다.
이 버스가 JR역에서 서면 있는 JR패스로 아바시리까지 돌아 올 수 있다. 혹시 공항이 있는 메만메츠에 선다면 아바시리까지 교통편이 많으니 제일 좋다. 하지만 이 버스는 점점 JR노선에선 벗어나고 있었다. 
그나마 사람 사는 곳이 나오고 버스 터미널 같은 곳에 도착했을 때, 2시 30분. 40분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은 버스기사도 지도에서 한참 찾아야 했던 토코로 버스 터미널.

그리고 아바시리로 돌아가는 버스는 4시 45분에 있어야 하지만, 그게 바로 겨울방학동안 축소된 바로 그 버스 였던 것이다.
다음 차는 오후 5시 20분, 아바시리 역에서 탈 열차보다 2분 늦게 출발하는 버스였다.
버스 한 번 잘못 타고, 40분 달렸을 뿐인데, 기차시간까지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돌아갈 방법이 없다니? 그런데 안 생겨요.

그냥 포기했다. 택시를 타면 거액 깨지겠지만, 이 동네는 아예 택시가 없다. 길 맞은편으로 오호츠크 해가 펼쳐진 토코로는 사람이 조금 많이 살긴 하지만 세상의 끝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포기하고 그냥 동네나 어슬렁거리기로 했다. 남는 건 시간뿐이라, 이 길 끝에 뭐가 나오는지 걷기 시작했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 아니라면 신선한 경험이었다. 반쯤 해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오호츠크의 넓은 바다에 가슴이 아릿해졌다.
이렇게 걷다가 외떨어진 라멘집이라도 나오면 ‘The 라멘 홋카이도편’의 한 장면이 아닌가. 혹시 그런 라멘집이라도 나오지 않을까하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보인것은 JA 토코로의 청과사무소, 직판소의 간판. JA는 말하자면 일본 농협. JA비에이-비에이센카-의 좋은 기억과 직판소라면 뭔가 먹을 거라도 팔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까이 가봤다.
직판소라고 하지만 내부는 사무실이고 한 귀퉁이에 뭔가 봉지에 든 걸 늘어 놓고 있긴했다. 어차피 시간이야 널널하고 운이 좋으면 사무실의 인터넷으로 시각표라도 확인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갔다.

수더분한 아저씨 두 분이 맞아주셨다. 봉투에 들어있는 감자 전분과 콩, 팥, 그나마  살 만한 것은 양파스프 정도였다. 야채나 과일은 시즌이 아니라서 없다는 설명.(당연히)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양파스프와 감자 전분 500그램을 샀다. 그러면서 두 분하고 더듬더듬 이야기를 나눴는데,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 오호츠크 유빙관을 가려다 버스를 잘못타서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 그리고 5시 18분에 열차가 출발하는데 5시 20분에 버스를 타야 한다는 이야기 등등.

기차표와 JR 홋카이도 패스 등을 보여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5시 18분 차를 타야하는데 버스가 5시 20분에 출발한다는 사실에 제일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다. (하긴 특급표 값이면.......) 두 분 중에 한 분이 시간 안에 돌아갈 방법이 없으면 태워다 주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 하다가, 에엣하고 작게 외쳤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사실 일찌감치 머릿속으로 피해액을 계산했었다. 버스를 타고 가도 아사히카와로 가는 다음 열차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실제로 없었다.) 그러면 아바시리에서 하루 묵어야 하는데, 제일 저렴한 곳도 4천엔 정도. 게다가 아사히카와에 예약한 숙소에다 취소 차지를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일은 패스를 쓰지 않을 예정인데 써버리면, 쿠시로를 못 가던지 차라리 홋카이도 패스 3일권(1만4천엔)을 하나 새로 사야 할지도 모른다. 일정이 꼬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내린 잠정적인 피해액 2만엔, 지금 환율을 생각하면.......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늘에서 쇠사슬이 내려온 셈이니.
야마다 상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30분을 달려 아바시리 역에 도착했을 때는 4시 10분이었다. 혼토니 아리가토고자이마스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행 때는 이런 일에 대비(?)해서 김을 사가지고 다녔는데, 그동안 홋카이도에선 한 번도 제대로 쓴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준비하지 않았다, 얼마나 죄송한지.

이번 여행 최대의 사고가 될뻔한 일은 이렇게 끝났다. 아바시리도 예정대로 취재를 끝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JA 토코로의 야마다 상, 이번에 살아서 돌아간다면, 다 야마다 상 덕분입니다.

라고 기차 안에서 정리했는데. 트러블은 끝나지 않았다.

아사히카와 역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내리지 않길래. "눈이 너무 내려서 문을 안 여나...."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캐리어를 번쩍 손에 들고 문을 향해 뛰었다.

이 사람들은 삿포로까지 가는 사람들이라 안 내린거야!

하지만 정말 간발의 차로 열차는 출발하고, 나는 망연자실하게 다음 역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역무원이 친절하게 다음 역에서 출발하는 열차편을 알려 줬는데, 20분 달려서 20분 기다리고 다시 20분 타고 돌아와야 하는 플랜.

아니 그나마 기차가 있으니 다행이지, 아바시리에서의 트러블을 생각하면. 그건 그렇고 이번에도 평생 올일 없는 역에서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도착한 아사히카와, 삿포로의 눈은 비교도 안 되는구만. 아까 야마다 상하고 차안에서 이야기하면서 더 북쪽인 아바시리가 오호츠크해의 난류 때문에 더 따뜻하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정말 눈이.......
여기가 그래도 홋카이도 제 2의 도신데, 공권력이 자연의 힘을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에 하나 좋은게 있었다면. 아사히카와에서 캡슐 호텔을 예약했는데, 호텔에 와보니 캡슐이 다차서 창은 없지만 싱글룸으로 업그레이드 해줬다.

by 까날 | 2009/01/16 00:06 | ├북해도 그라피티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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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아비게일 at 2009/01/16 00:13
...우와 설국에서 버스 잘못타서 버려질뻔했구나.
Commented by ojay at 2009/01/16 00:14
그 상황에서 "동네를 어슬렁거릴" 생각을 하는 네가 대단해 보인다는.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생각이었지만)/남은 일정 고생 좀 덜하고 조심해서 잘 다녀와.
Commented by NOT_DiGITAL at 2009/01/16 00:15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나저나 야마다상의 호의는 정말 행운이었네요.

NOT DiGITAL
Commented by 아메리카노 at 2009/01/16 00:15
진짜 여행하다보면 아찔한 순간이 있긴한데 이번은 정말 아찔하셨겠어요! 그래도 다행임!
Commented by 녹차벌레 at 2009/01/16 00:36
멀쩡한 네비게이터랑 지도가 사람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는 첩첩산중 산속싶은곳 길도없는곳에 데려다 주기도 하는데뭐.....^^
그래도 마을로 갔자나......
Commented by 대한독립군 at 2009/01/16 00:40
위험하셨군요; 그래도 무사히 도착하셨다니 다행입니다.
2만엔이란 돈을 생각하니 그냥 아찔해지네요;
Commented by 도리 at 2009/01/16 01:09
크아... 역시 나의 홋카이도! [...]

저동네가 원래 저런 동네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생활했던 것이 엊그제같은데 어느덧 3년전 이야기네요...[...]
Commented by churrr at 2009/01/16 03:04
아사히카와... 그 유명하다는 라멘의 고장!
사진과 글 잘 보고갑니다. :)
Commented by 하야테 at 2009/01/16 03:09
아바시리.. 그 동네에서 큰일날뻔 하셨네요 ㅠㅠ
Commented by 수려 at 2009/01/16 12:22
아후;;; 한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정말 큰일날뻔하셨네요!!ㅠㅠㅠㅠㅠㅠ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Commented by 지름판™ at 2009/01/16 12:27
고생하셨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Commented by 로무 at 2009/01/16 13:42
감사감사. 전생의 선행이 이런데서 다 발휘되는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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